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십자군 전쟁 (문단 편집) == 개요 == '''십자군 전쟁'''([[十]][[字]][[軍]][[戰]][[爭]], Expeditio Sacra)은 1095년부터 1291년에 걸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레반트]]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간헐적으로 발생한 [[유럽]] [[기독교]] 국가들의 [[이슬람]] 원정을 가리킨다. 흔히 '크루치아테(Cruciatae)'로도 불렸으며, 현대 영어로는 '크루세이드(Crusades)'라고 한다. 이는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자신들의 의복과 장식에 십자가 문양을 그려 넣었던 데에서 유래했다. 1071년 [[동로마 제국]]의 [[황제]] [[로마노스 4세]]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알프 아르슬란]]에게 대패한 뒤 근동 일대에 대격변의 시기가 찾아오고, 결과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기존 핵심 지역이던 [[아나톨리아]] 대부분을 잃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의 상실은 동로마 제국에게 이전의 영토 상실보다 큰 위험으로 다가왔는데, 신병모집의 근거지이자 곡창지대였던 넓은 평원의 상실은 동로마 제국에게 있어서 크나큰 경제적/군사적 손실이었고, 아나톨리아의 지정학적 위치 역시 매우 중요했다.] 1081년 새로운 황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여 이를 수습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회복하고자 했지만, 남[[이탈리아]]의 [[노르만족]], 북방의 [[페체네그족]], 그리고 아나톨리아의 [[셀주크 제국]] 등 사방에 적들이 너무 많아 약해진 제국의 힘만으로는 부족했다. 때문에 제국은 전쟁으로 인한 군비가 팽창하는 1040년대를 전후하여 꾸준히 해오던 지원 요청을 보다 다급하게 해오고 있었다. 그러한 요청의 일환으로 1095년 3월 피아첸차에서 열린 공의회에도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피아첸차에서 이들을 접견한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스러운 교회를 수호할 수 있도록 이교도들에게 맞설 원군을 보내달라"정도의 내용의 요청을 듣고는 본격적으로 십자군을 위한 여론 조성에 나섰다. 그렇게 1095년 11월의 클레르몽 공의회를 기점으로 서유럽은 약 200년간 여러 차례[* 작은 규모로는 7차~8차로 계산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는 9차까지 정의하는 경우도 있으나, 8차와 9차를 묶어 8차까지라 보는 경우도 있다.]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게 되면서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